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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그 특사 사건 (1)

기사승인 2021.03.03  16:2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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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11월 17일에 덕수궁 수옥헌(지금의 중명전)에서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대한 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했다. 그런데 고종은 국제사회에 을사늑약은 무효라고 주장했다. 고종은 헐버트를 통해 미국 정부에 늑약의 부당성을 알렸지만 미국 국무성은 외면했다.

고종은 다시 전 주한미국 공사 알렌에게 로비자금을 주면서 미국 정부가 열강과 공동으로 진상조사를 해주도록 부탁했다. 그러나 루스벨트 미국 정부는 전혀 호의적이지 않았고, 이를 잘 알고 있던 알렌도 로비자금을 반납하고 1906년 2월부터 모든 활동을 중단했다.

이러자 고종은 1907년 6월에 네델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단을 파견했다. 만국평화 회의는 1899년에 처음 열려 군비축소와 국제중재재판소 설치 문제를 다루었지만. 당시 서구 열강의 식민지 쟁탈전으로 큰 호응을 받지 못했다.

제2차 만국평화회의는 러일전쟁으로 촉발된 군사적 위험을 막기 위해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이 먼저 제안했으며 1905년 9월 5일 포츠머스 조약직후 러시아가 회의를 주관하는 것으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를 알게 된 고종은 한국도 정식 초청되도록 러시아에 비밀리에 로비하였다.

1907년 4월 20일에 평리원 검사 출신 이준(1859-1907)은 고종의 밀서를 휴대하고 서울을 출발했다. 밀서는 전권 위임장과 ‘러시아는 한국이 무고하게 화를 입고 있음을 생각하여 한국 대표를 참석시켜 한국 정세를 설명토록 한 다음 만국의 공의와 정론을 일으켜 한국이 권리회복을 얻도록 도와달라’는 내용의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보내는 고종의 친서였다.

「짐은 오늘의 경우가 간난(艱難 힘들고 고생스러움)하여 회고해도 호소할 곳이 없습니다. ……현하(現下)의 정세는 깊이 분개하지 않을 수 없는 터이니 폐하는 우리나라가 무고히 화(禍)를 당하고 있는 정상을 생각하여 짐의 사절(使節)로 하여금 우리나라의 형세를 해당 회의에서 설명할 수 있게 하여 만국 공연(公然)의 물의를 일으킬 수 있다면 우리나라의 국권이 회수될 수 있을까 기대합니다……」 - 고종의 친서

이와는 별도로 4월 초에 고종의 특사 헐버트는 가족과 함께 스위스로 떠났다.

이준은 5월 20일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북간도에서 달려온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1870-1917)을 만나 시베리아 열차로 러시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했다.

6월 4일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 이들은 주러시아 한국공사였던 이범진의 둘째 아들 이위종(1884-?)을 만났다. 23세의 이위종은 영어 · 불어 ·러시아어에 능통한 주러시아 한국공사관 참서관 출신인 직업외교관이었다.

이로써 세 특사가 구성되었다. 헤이그 특사 일행의 공식 대표는 이상설이었고, 고종의 밀명을 직접 받은 이는 이준이었으며, 통역과 연설로 외교활동을 펼치는 임무는 이위종이 맡았다.

여기서 세 특사는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를 알현하기 위해 15일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체류하면서 교섭을 벌였지만 허사였다.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비밀협상이 잘 이루어져 러시아의 입장이 바뀐 것이다. 러일비밀협상은 러시아는 외몽고에 있어서 러시아의 특수 이권을 인정받는 대신, 일본은 한국에 있어서 현실적인 지배를 승인받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 정부는 헤이그 특사단의 요구를 외면했고, 이 사실을 알 리 없는 특사단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시간을 허비한 것이다.

6월 19일에 특사단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나 베를린에 도착하여 공고사(탄원서)를 인쇄한 다음, 제2차 만국평화회의 개최 열흘이 지난 6월 25일에야 헤이그에 도착하였다. 제2차 만국평화회의는 44개국 대표 225명이 참석한 가운데 1907년 6월 15일에 열려 10월 18일까지 계속되었다.

특사들은 도착 즉시 시내의 융(Jong) 호텔에 숙소를 정해 태극기를 게양하고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들의 도착 사실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주재 네델란드 신문사 특파원이 6월 28일에 보도함으로써 유럽 각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주)헤이그 특사는 헤이그 밀사로 부르기도 했는데, 특사로 부르는 것이 맞다. 고종 황제는 위임장을 주면서 헤이그 특사를 파견하였지, 은밀하게 밀사를 파견한 것이 아니다.

< 참고문헌 >
o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43 국권회복운동, 탐구당, 2003
o 김태웅 · 김대호 지음, 한국 근대사를 꿰뚫는 질문 29, 아르테, 2019
o 정성화 외, 러일전쟁과 동북아의 변화, 선인,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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