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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권력의 비리를 척결한 박상

기사승인 2020.12.10  14:2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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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권력의 비리를 척결할 수 있을까? 그것도 폭군 연산군 시절에. 그런 강직한 관리가 있다. 중종 시절에 청백리로 두 번이나 뽑힌 박상(朴祥 1474∽1530)이다.

전라도 나주에 우부리(牛夫理 일명 소부리)라는 노비가 있었다. 그는 연산군의 애첩 숙화(淑華)의 아비였는데, 이를 배경으로 남의 토지를 약탈하고 부녀자를 겁탈하는 등 온갖 패악을 저질렀으나, 어느 누구도 감히 살아있는 권력을 손보지 못했다.

「연산군일기」에는 숙화의 아비에 대한 기록이 두 군데 나오는데 그 위세가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연산군일기 1506년 4월 25일 전교하였다. "김의(金依)는 당상으로 승진시켜라"
김의는 곧 숙화(淑華)의 아비다.

연산군일기 1506년 5월 12일 전교하였다.
"숙화의 아비 김소부리(金小夫里)가 나주로 내려갈 때 말을 지급하라."

소부리는 나주의 종으로 숙화가 임금의 총애를 독차지함을 믿고 교만 방자하므로, 온 전라도가 그를 맞이하고 전송하며 지공 접대(支供接待)하기에 분주하고 겨를이 없어, 임금의 명을 받은 사신처럼 하였으며, 소부리는 수령과 대좌하여 술잔을 주고받기까지 하였다.”

원래 숙화는 나주 기생 백견인데 연산군에게 뽑혀 궁에 들어갔다. 그녀는 임금과 동침한 천과흥청(天科興淸)에게 주었던 작호(爵號)중 하나인 숙화(淑華)를 받을 정도로 연산군의 총애를 받았다.

우부리의 패악 소식을 들은 전라도사(全羅都事 종5품) 박상은 1506년 8월에 전라도 나주 금성관에서 우부리를 심문했다. 그는 1501년에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좌랑을 지내고, 1505년 부터 전라도사로 전주 감영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런데 우부리가 자기 죄를 자복하지 않자, 박상은 그에게 곤장을 치라고 명하였다. 그런데 곤장을 심하게 때린 탓에 우부리가 죽고 말았다.

박상은 화를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서울로 올라갔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박상을 체포하기 위해 내려오던 금부도사와 길이 엇갈렸다. 박상이 정읍을 지나 10리쯤 가는데 고양이 한 마리가 이상한 시늉을 하면서 큰 길을 피해 샛길로 들어갔다. 박상이 이상하여 따라가 서울로 올라가니 세상이 바뀌었다, 중종반정이 일어난 것이다.

박상은 고양이를 계속 따라갔다. 고양이는 금강산 어느 절로 들어갔다. 이후 박상은 고향 광주에 있는 전토(田土)를 따로 떼어 거기에서 수확한 쌀로 금강산 절에 시주했다. 고양이 먹이 비용이었다. 『눌재집』 부록 박상 연보에 나온다. (김동수, 눌재 박상, 동인출판문화원, 2016, p 110-111)

박상은 두 번이나 청백리로 뽑혔다. 1515년 담양부사 그리고 1524년 충주목사 시절이었다.

먼저 1515년 2월 16일 자 「중종실록」이다. 전교하였다.

“청백탁이(淸白卓異)한, 예조 판서 김전·도승지 손중돈·좌부승지 조원기·승문원 판교 강숙돌에게는 각각 한 자급을 더하고, 충청도 절도사 김연수에게는 당표리(唐表裏 중국산 안팎 옷감)를 하사하며, 담양 부사 박상·여산 군수 송흠에게는 각각 향표리(鄕表裏국산 안팎 옷감)를 하사하라.”

다음은 1524년 9월 12일 자 「중종실록」이다. 충청도 관찰사 김굉이 치계(馳啓)하였다.

“충주 목사 박상은 청렴하고 근신하여 직분을 지키고 일을 다스리는 데에 숙달하였으며 마음을 써서 어루만지고 돌보아 백성이 혜택을 많이 받습니다. 부여 현감 최필한은 송사를 다스리는 데에 어둡고 백성을 돌보는 일을 힘쓰지 않으며 부세를 거두는 것이 너무 중하고 형벌을 쓰는 것이 지나칩니다.”

이러자 중종임금은 박상에게 향표리(鄕表裏) 1벌을 주고 최한필을 파직하라고 명하였다.

그런데 박상은 너무 강직하여 임금과 대신들의 외면을 받았다. 그래서 중앙보다 주로 지방에서 근무했다. 그는 1527년 여름에 나주목사에 부임하였는데 1528년 10월에 부임한 전라도 관찰사 조방언이 그에게 인사고과를 최하위로 주었다. 관찰사의 음흉하고 야비한 처사에 화가 난 박상은 나주 목사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1530년에 별세했다. 나이 56세였다.

박상은 1515년 8월 담양부사 시절에 순창군수 김정과 함께 ‘신비복위소’를 올려 바른 언론을 펼친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강개한 선비 박상! 그는 살아있는 권력에도 전혀 굽히지 않았다.

김세곤 segon53 @hanmail.net

<저작권자 © 호남미래포럼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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