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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 시대의 전염병과 재해 (29)

기사승인 2020.09.29  15:4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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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1년 5월 1일에 현종은 비변사가 건의한 진휼 정책을 윤허했다. (현종개수실록 1671년 5월 1일)

비변사가 일찍이, 강도(江都 한강 주변)의 해묵은 콩 1만 섬을 경기 고을의 백성들에게 나누어 지급하고 또 6백 섬을 수원의 군병들에게 나누어 지급할 것을 청했었는데, 강도의 저축이 부족하여 숫자에 맞추어 지급하기에 어려움이 있자, 원수(元數 본래의 저축분) 안의 1천 6백 섬은 경창(京倉)의 콩으로 나누어 지급하였다가 가을에 다시 경창으로 환급하기를 청하였는데, 임금이 윤허하였다.

5월 6일에 사간원 정언 정유악이 상소하였다.

"삼가 듣건대, 구휼소에서 죽을 먹이는 일을 이달 15일에 중지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세 곳에서 죽을 먹던 백성들이 결국 갈 곳이 없어 죽게 될 것입니다. 특별히 명하여 잠시라도 홍제원(弘濟院)의 구휼소 그대로 남겨 두고 가을까지 죽을 쑤어 주어 혜택을 끝까지 베푸소서.

그리고 삼남(三南)의 일도 매우 어려우니, 보릿가을이라고 하여 진휼을 중지할 수 없습니다. 그 가운데에서 더욱 심한 고을은 빨리 방백(方伯)을 시켜 끝까지 구제하게 하는 것이, 가까운 데를 미루어 먼 데에 미치고 한결같이 보아서 차별 없이 사랑하는 도리에 맞는 것입니다."


이러자 현종이 답했다.

"나라를 근심하여 말해 준 정성을 내 아름답게 여긴다. 의정부를 시켜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겠다."

그 뒤 인견할 때에 허적이 아뢰기를,

"구휼소 폐쇄 여부는 정유악이 아뢴 대로 한 곳만을 남겨 둔다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이윽고 민정중이 아뢰었다.

"정유악이 아뢴 바는 대체로 좋으나, 국가의 형세가 결코 지탱할 수 없을 뿐더러 한 곳만 남겨 두는 것도 폐단이 없을지 모르겠습니다."

서필원도 아뢰었다.

"지금 밀과 보리가 전부 흉작이어서 결코 끝까지 구제할 희망이 없으니 반드시 살릴 수 없을 사람에게 헛되이 쓰는 것보다 차라리 조금 저축을 남겨 두어 토착민을 구제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따라서 모두 폐지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이렇게 여러 신하들의 의논이 구휼소를 폐지해야 한다고 하니, 정유악이 피혐하였다. 이러자 사헌부가 처치하였고 현종은 정유악을 체직하였다. (현종개수실록 1671년 5월 6일)

이때 구휼소를 설치한 지가 이미 오래되어 나라의 저축이 바닥이 났으며 사망자는 날로 늘어나고 구제할 방책이 없었다. 날마다 밀과 보리가 익기를 기다렸으나, 밀과 보리가 처음에는 매우 무성하다가 갑자기 병이 들어 시들어서 줄기와 잎이 모두 누렇게 되어 한꺼번에 말라죽었는데 온 들판이 모두 그랬다. 이로 말미암아 큰 흉년이 들었다. 공사간에 희망이 끊어지고 인심이 크게 무너져 아침저녁도 보전치 못하게 되었다. (현종개수실록 1671년 5월 6일)

5월11일에는 비변사가 백성의 구휼을 아뢰었다.

"출막(出幕)하는 병든 자에 대해서 비변사의 낭청을 나누어 보내 적간(摘奸 죄상이 있는지 없는지를 밝히기 위하여 캐어 살핌.)하고 양식을 지급하라는 명이 일찍이 있었습니다. 동·서도(東西道)에 이미 양식을 지급하였습니다만, 두 활인서(活人署)에서 관리하는 1천여 명 이외에도 개인 막사에 있는 자가 7,860여 명인데, 이들에게 진휼청의 쌀로 양식을 계산하여 지급하였습니다만, 필시 빠진 자도 있을 것입니다. 지금 잇달아 출막하는 자도 그 숫자를 알 수 없다고 하니, 죽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어 매우 딱합니다.

그 가운데 출막하여 죽어서 그 가족이 이미 초빈(草殯 장사를 속히 치르지 못하고 송장을 방 안에 둘 수 없을 때, 관을 놓고 이엉 따위로 그 위를 이어 눈비를 가릴 수 있도록 덮어 두는 일)을 마쳤거나 혹 덮어 묻을 도구를 장만하는 자가 매우 많은데, 이것은 거론할 것이 없겠습니다. 하지만 시체가 길 위에 놓여 있어도 거두어 묻어 주는 사람이 없어서 혹 부패하기도 하였고 혹 날짐승이 쪼아먹기도 하는 경우도 매우 많습니다. 이것은 대개 해당 관원이 직무를 제대로 거행하지 못해서 생긴 일입니다. 우선 무겁게 추고를 하여 경계시키소서.“


이러자 현종이 윤허하였다. (현종개수실록 1671년 5월 11일)

김세곤 segon53 @hanmail.net

<저작권자 © 호남미래포럼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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