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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 시대의 전염병과 재해 (28)

기사승인 2020.09.21  17:0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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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1년 4월17일에 진휼청(賑恤廳)이 아뢰었다.

"서울의 구휼소를 임인년(1662년)에는 3월 11일에 설치하였다가 5월 10일에 파하였으며 무신년(1668년)에는 2월 2일에 설치하였다가 5월 25일에 파하였습니다. 금년에는 1월 16일에 처음 설치하였는데, 기근이 더욱 심하여 도성의 백성들 이외에도 외방에서 돌아다니며 빌어먹는 무리들도 많이들 와서 죽을 얻어먹고 있습니다.

만약 구휼소를 파하는 날자를 미리 알려주고 고향에 돌아가서 살아갈 바탕을 미리 마련해주지 않는다면 필시 굶주린 백성들이 그때 가서 낭패를 보게 될 것입니다. 과거의 예에 따라 5월10일에 구휼소를 파하되, 처음부터 끝까지 죽을 얻어먹다가 구휼소를 파하여 고향에 돌아가게 된 사람들에 대해서는 4일 치의 양식을 지급하라는 뜻으로 구휼소에 미리 분부하소서."


현종은 그렇게 하겠다면서 "15일에 진휼을 정지하라는 뜻으로 분부하라."고 명했다. (현종개수실록 1671년 4월 17일)

4월 19일에 대사간 남용익, 사간 이합, 정언 윤계 등이 전염병에 관한 제사를 거행하도록 아뢰었다.

"지금의 백성들의 일은 말하자면 참으로 참담합니다. 우선 눈으로 직접 본 것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기근과 여역이 함께 일어나 시체들이 서로 겹쳐 쌓였으며 찌는 듯한 나쁜 기운이 안팎으로 가득합니다. 심지어 진휼을 하던 대소 관원들까지 잇달아 전염이 되었습니다. 성안의 모든 집들이 귀천을 가릴 것없이 제대로 남아난 집이 없으며 황급하고 경황없는 것이 병화(兵火)보다도 심합니다. 서울이 이러하니, 외방은 알 만합니다. 예전에는 여역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지 않았어도 으레 서울과 외방에서 특별히 여제(癘祭)를 지냈습니다. 해조로 하여금 서둘러 먼저 서울에서 제사를 지내게 하고, 외방에는 관원을 보내어 제사를 지낼 일도 또한 계품하게 하여 차례로 거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따랐다.

이윽고 예조가 아뢰었다.

"갑인년의 전례에 의하여, 날을 잡지 말고 산천제(山川祭)와 성황제(城隍祭)를 먼저 행하고 북교(北郊)의 여제에는 중신을 보내고 민충단(愍忠壇)에는 근신을 보내어 같은 날에 설행하게 하소서. 그리고 외방은, 험천(險川), 쌍령(雙嶺), 금화(金化), 토산(兎山), 강화(江華), 진주(晉州), 남원(南原), 금산(錦山), 달천(㺚川), 상주(尙州), 원주(原州), 울산(蔚山) 등 열두 곳은 모두 왕의 군대가 전사한 곳이기 때문에 경연 신하와 대간의 논계를 인하여 무신년과 경술년 두 해에 혹은 전염병 때문에 혹은 가뭄 때문에 관원을 보내어 제사를 지낸 일이 이미 사전(祀典)에 들어 있습니다. 일체 거행하소서." 이러자 현종은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현종개수실록 1671년 4월 19일)

4월 27일에는 진휼청이 백성 구제에 관해 아뢰었다.

"근래에 도성 백성들의 기근이 날로 심하여 시장의 쌀 한 섬 값이 은(銀) 닷 냥이나 되니, 그 급박함을 알 수가 있습니다. 구제하는 일을 하지 않아서는 안 되겠는데, 본청에 저축해 두었던 쌀과 콩은 이미 바닥이 나서 남은 것이 없고 달리 대책을 세울 길이 없습니다. 이번에 서쪽에서 운송해 오는 쌀은 비록 호조의 경비를 위한 것이기는 하지만 일의 형세에 완급의 차이가 없을 수 없으니, 그 가운데에서 전미(田米) 1만 석을 우선 덜어내어 지난번에 했던 것처럼 민호(民戶)의 크기에 따라 나누어 지급하고 가을이 되거든 다시 받아들여 호조에 되갚으면 또한 손실되는 것도 없을 것이고, 도성 백성들의 위급을 구제하는 길이 이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하도록 분부하소서." 이에 현종이 윤허하였다. (현종개수실록 1671년 4월 27일)

한편 서울 안에 구휼소가 세 군데인데, 한 곳에 죽을 먹으러 가는 굶주린 백성이 혹 1만여 명, 혹 7, 8천 명, 혹 5, 6천 명이었다. 이달에 죽은 자가 무려 5백여 명이나 되었고 길에 쓰러져 죽은 자들도 매우 많았다.

각 도에서 굶주려 죽거나 병을 앓아 죽은 자에 대해 보고한 것도 1만여 명이었다. 경상도와 전라도의 각 고을에서 죽을 먹으러 간 굶주린 백성의 수는 한 도를 합할 때 많으면 20여 만이었고 적어도 18, 19만에 밑돌지 않았다. 이런 참혹한 기록은 1671년 4월 29일 자 현종개수실록에 실려 있다.

김세곤 segon53 @hanmail.net

<저작권자 © 호남미래포럼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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