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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 시대의 전염병과 재해 (22)

기사승인 2020.08.10  11: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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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1년 2월 29일에 전라 감사 오시수가 보고하였다.

"기근이 이미 극에 달하여 살해하고 약탈하는 변이 없는 곳이 없으나, 무덤 도둑에 있어서는 전에 듣지 못하던 일인데, 보성군의 교노(校奴 향교에 소속된 노비) 일명(日命)과 사노(寺奴 절의 노비) 최일(崔日)과 남원부(南原府)의 어영군(御營軍) 김원민(金元民)과 사노(私奴) 철석(哲石) 등이 남의 고장(藁葬 짚이나 거적에 싸서 묻은 시체)을 파서 시신의 옷을 모두 벗겨서 버젓이 팔다가 시신의 친척에게 발각되어, 추위에 다급하였기 때문이라 하며 군말 없이 자복하였습니다."

이러자 현종은 전라감사의 보고서를 형조에 내려보냈다. 형조가 대신들에게 의논하기를 청하니, 모두 들 ‘추위에 다급하여 그랬다 하더라도 그 정상을 따져 보면 강도보다 더 심하니 그 죄는 죽어 마땅하고 법에 있어서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하였다. 현종은 대신들의 의논대로 처벌하라고 형조에 명하였다.

아무리 흉년에 춥고 배고프다고 전라도 사람들이 무덤을 파헤쳐 시신의 옷을 벗기다니 이런 일이 어디에 있나? 요즘 같으면 연일 방송에 나올 뉴스이다. 한편 진휼청(賑恤廳)이 2월에 돌본 굶주린 백성이 2만 명이었고 죽은 자가 60명이었다. 진휼청은 이들에게 먹일 죽을 30, 40가마를 쑤어서 썼는데 닭이 울 때 시작하여 한낮에 이르러 끝나고, 정오 때 다시 죽을 쑤어서 밤이 깊어서야 파하였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너무나도 붐벼서 혹 먹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두 번 이상 먹는 자도 있었다. (현종개수실록 1671년 2월 29일 3번째 기사)

그런데 경상도에서는 죽을 먹는 곳에 나온 굶주린 백성이 7만 4천 8백 50여 명이었고 죽은 자가 90여 명이었다. 팔도에 기아와 전염병과 천연두로 죽은 백성을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였는데, 특히 삼남(三南 : 충청 ·경상 ·전라)이 더욱 심하였다. 그리고 물에 빠져 죽고 불에 타서 죽고 범에게 물려 죽은 자도 많았다. 늙은이들의 말로는 이런 상황은 태어난 뒤로 보거나 들어본 적이 없는 것으로서 참혹한 죽음이 임진년의 병화보다도 더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수령이 보고한 것은 죽을 쑤어 먹이는 곳에서 죽은 자만 거론하였을 뿐이고 촌락에서 굶어 죽고 도로에서 굶어 죽은 자는 대부분 기록하지 않았다. 심한 자는 진구를 잘하였다는 이름을 얻으려고 서로가 경쟁하여 덮어 두고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았으므로 보고한 숫자는 겨우 열에 한둘이었다. (현종개수실록 1671년 2월 29일 4번째 기사)

경기도에서도 2월 보름 이전에 전염병으로 죽은 자가 1백 47명이었고 굶어 죽은 백성이 13명이었다.

3월 3일에는 왕세자의 가례(嘉禮) 때에 서울과 지방에서 진전(進箋임금에게 올리는 축하의 글)·진하(進賀)하고 방물(方物 : 감사나 수령(守令)이 임금께 바치는 그 고장의 특산물)·물선(物膳)을 봉진하는 규례가 있으므로 예조가 규례에 따라 계품啓稟하니, 현종 임금은 진전(進箋)만 올리고 방물·물선은 봉진하지 말라고 명하였는데, 흉년이기 때문이었다. (현종실록 1671년 3월 3일 1번째 기사)

3월 4일에는 경상도에서 굶주린 백성으로서 죽을 나누어 주는 곳에 나온 사람이 9만 8천 3백 60여 명이었고, 죽은 자가 1백 40여 명이었다. (현종개수실록 1671년 3월 4일)

3월 6일의 실록에는 상평청(常平廳)의 진휼한 곳에 월초月初에 진구 받으러 간 자가 6천70여 명이었고, 1월 20일 이후로 죽은 자가 50여 명이라고 기록하였다. (현종실록,현종개수실록 1671년 3월 6일)

3월 10일에 함경도에서 굶주리는 백성이 2만 1천 3백 70여 인이었다. 아울러 2월 27일 이후로 비와 눈이 잇따라 내리고 날씨가 추워서 밭이 얼어붙어 갈 수가 없었다.(현종실록 1671년 3월 10일 1번째 기사)

한편 전라도에서 전염병으로 죽은 자가 1천 7백 30여명 이었고 굶주리는 백성이 13만 3천 5백 90여 인이었으며, 죽을 먹이는 곳에서나 도로에서 죽은 자가 1백 40여 인이었고 지난해 10월 이후로 각 고을의 감옥에 있는 죄수(獄囚) 중에 얼어 죽거나 굶어 죽은 자가 1백 30인이었다. (현종실록 1671년 3월 10일 2번째 기사)

김세곤 segon53 @hanmail.net

<저작권자 © 호남미래포럼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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