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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 시대의 전염병과 재해 (20)

기사승인 2020.07.28  14:4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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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1년 2월 7일에 사헌부가 각 아문에서 곡물을 팔 때 진휼청의 예에 따르기를 청했다.
(현종개수실록 1671년 2월 7일)

사헌부가 아뢰었다.

"훈련도감이 1천여 석의 곡물을 내다 팔았고, 어영청이 판 것도 수백 석이 넘는데 혹은 아문 소속에게 주거나 혹은 이익을 꾀하는 사람에게 주기도 하여 사사로이 매매하여 그 이익을 독점하고 있으며, 수어청과 총융청 및 사복시도 곡물을 판 일이 있습니다.

이러하니 모리배 한 사람이 수백 석을 받기도 하고 혹 1천 석에 가까운 자도 있다 합니다. 그러므로 각 아문을 시켜 곡물을 많이 받은 자를 엄중히 조사하여 무겁게 죄주게 하고, 앞으로 파는 곡물이 있으면 모두 진휼청(賑恤廳)의 예(例)에 따르게 하여 서울 백성에게 혜택을 주는 바탕으로 삼으소서.” 
이러자 현종은 각 아문에 조사하여 보고하도록 명하였다.

2월 9일에 현종이 창덕궁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변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현종이 사헌부의 차자(간단한 보고서)를 좌의정 허적에게 보이자, 허적이 받아서 읽고 나서 아뢰었다.

"백성의 일이 급급하여 이 차자는 급박함을 구제하려는 뜻에서 나왔습니다마는, 이것은 일을 경험해 보지 못하고 하는 말입니다. 마른 양식을 나누어 주는 일은 시행할 수 없을 듯합니다. 어사를 내보내는 일은 위에서 참작하여 처치하시는 것이 옳겠습니다."

현종은 그러겠다고 말하였다. 이어서 현종은 판윤 민정중에게 물었다.

현종 : "굶주리는 백성의 숫자가 지금 얼마나 되는가?"
민정중 : "2만 명입니다."
현종 : "2만 명에게 먹일 수 있는 죽은 얼마인가?"
민정중 : "30부(釜)입니다."
현종 : "굶주리는 백성 가운데 사망자가 있는가?"
민정중 : "잇달아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러자 허적이 아뢰었다.

"자기 집에서 죽은 자는 그 숫자가 얼마인지 모르고, 오부(五部 : 한성부에 설치한 다섯 관서 즉 중·동·남·서·북부)의 정보 보고서를 보면 길가에 시체들이 연이어 있다고 합니다."

2월 10일자 「현종개수실록」에 따르면 국가 재정이 이미 바닥났다.
호조의 삼창(三倉)에 저축된 것이 4만 석도 채 못 되어 두 달도 버틸 수가 없었으므로 강도(江都)의 군향미(軍餉米) 3만 석과 관서의 쌀 3만 9천 5백 석을 가져다 경비를 보충하고, 또 강도의 쌀 2만 4천 석과 관서의 쌀 1만 5백 석을 가져오고 또 어영청의 보미(保米) 5천 석을 대여하여 진휼의 밑거리를 채웠다.

한양의 기근이 날로 심하여 한 섬 쌀값이 은 3냥이었으므로 진휼청이 쌀 8천 3백여 석을 내되 한 섬 값을 1냥 8전으로 정하였다. 또 목포(木布)로 계산하여 바치는 것을 허용하여 백성을 편리하게 하되 한 사람이 1냥을 넘지 못하게 하여 이익을 노리는 폐단을 막았다. 또 쌀 1만 2천 8백여 석을 내어 서울 백성에게 대여하되 호수(戶數)를 계산하고 등급을 나누어, 대호(大戶)는 1석, 중호는 10두, 소호는 5두, 독호(獨戶)는 2두를 주고, 봉료(俸料)를 받는 군사는 대호·중호·소호를 막론하고 모두 3두를 주었다. 이 때문에 굶주리는 자가 자못 구제되었다. 이렇듯 여러 도에 전염병과 굶주림으로 죽은 자가 더욱 많아졌다.

평안도는 전염병(여역)으로 죽은 자가 59명이었고, 경상도는 전후의 굶주린 백성이 3만8천9백67명이었는데 굶주려서 죽거나 병이 들어서 죽은 자가 3백여 명이었다. 충청도는 옥천 등의 고을에 굶어 죽은 자가 69명이었고 여역도 점점 심해졌다. (현종개수실록 1671년 2월 13일)

한편 2월 15일에 제주 목사 노정(盧錠)이 기근의 급박한 사정을 보고하였다.
(현종개수실록 1671년 2월 15일)

"지금 섬이 온통 굶주리고 있는 백성으로 가득하며, 얼거나 굶주리거나 여역으로 죽은 자가 이미 4백 37명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공사간의 저축이 모두 바닥이 나서 구제하여 살릴 방책이 없으니, 이전하는 미곡이 때에 미쳐 빨리 들어오지 않으면 수만의 죽어가는 목숨이 장차 눈앞에서 숨이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매우 근심되고 몹시 답답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이때 멀리 떨어져 있는 제주도에 기근이 특히 심하여 민간의 형세가 날로 더욱 위급해지고 있었다. 목사 노정이 날마다 조천관(朝天館)에 나와 곡물을 날라 오는 배를 기다렸고 굶주린 백성도 뒤를 따랐다. 배 하나가 멀리서 다가오자 급히 가서 보았는데 곡물을 실은 배가 아니었다. 노정이 통곡하면서 돌아왔으며 굶주린 백성들도 한꺼번에 울부짖었다. 듣는 자가 모두 슬퍼하였다.

김세곤 segon53 @hanmail.net

<저작권자 © 호남미래포럼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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