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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 시대의 전염병과 재해 (9)

기사승인 2020.05.11  11:2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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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0년(현종 11년) 9월 11일에 제주도 세 고을에 크게 기근이 들어 다투어 말을 잡아먹었다. 백성들은 ‘말을 잡아먹느니 차라리 말을 국가에 바치고 국가 곡식을 받아먹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이에 제주목사 노정이 조정에 보고하였다. 이러자 좌상 허적이 태복시(궁중의 가마·마필(馬匹)·목장 등을 관장한 관청. 정식명칭은 사복시) 소속의 양남 둔전의 곡식으로 값을 계산해 주고 말을 사들여 연해의 목장에 두도록 현종께 청하니, 현종이 허락하였다.

9월18일에 현종이 양심합(창덕궁 대조전 별각)에서 대신과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좌상 허적이 아뢰었다.

"제주에 기근이 아주 심하여 이미 쌀  3 천 석을 지급하였습니다만 지금 구호품을 받으러 나온 백성이 2천 명이라고 하니, 이전에 보낸 곡물로 다 구제하기가 어렵습니다. 통영의 쌀 2천 석을 다시 보내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이러자 상이 허락하였다.

9월29일에 현종은 임기가 만료된 수령들을 내년 보리 추수 때까지 유임시킬 것을 명하였다. 이때 팔도에 큰 흉년이 들어, 수령을 맞이하고 전송하는 일이 고을 백성들의 큰 폐단인데다가, 구휼을 처리하는 일이 서툰 자에게 수령을 맡길 수 없었기 때문에 이런 어명이 있었다.

10월13일에 현종이 양심합에 나아가 대신과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호조 판서 권대운이 아뢰었다.

"가을 석 달 동안에 사용한 쌀이 이미 3만 석을 넘었는데, 과외의 용도가 많아 이렇게 된 것입니다. 저축이 바닥이 날 판이어서 백관의 봉록도 군병의 급료도 지급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나랏일이 참으로 걱정입니다."

홍문관 교리 김석주도 아뢰었다.

"석 달 동안 사용한 쌀이 3만 석을 넘어섰다면, 이것은 상께서 절약하지 못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궐내에서 먼저 검소한 생활로 비용을 힘써 줄이시고 지성으로 백성을 구제하셔야 합니다."

당시 극심한 기근에도 공주의 집 짓는 일을 그치지 않아 비용이 막대 하였기 때문에 신료들의 말이 이와 같았다.

이윽고 좌상 허적이 아뢰었다.

"오늘날 가장 급한 일은 신역(身役 공공 노역)을 감면하는 일입니다. 다만 신료들의 의견이 각기 다릅니다. 이조판서 조복양은 재해의 경중을 막론하고 일체의 신역을 모두 감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신의 생각은 그렇지 않습니다. 한 해의 경비는 반드시 
7, 8천 동의 목면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 모두 감면한다면 나라의 재정이 파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재해가 특히 심한 읍은 전액 감하고 그다음은 반만 감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이러자 우상 홍중보가 아뢰었다.

"신도 처음에는 조복양의 말이 옳다고 여겼습니다만, 나라의 재정도 생각지 않을 수 없으니 좌상의 말이 옳은 듯합니다."

병조 판서 김좌명도 아뢰었다.

"호조와 병조의 재정이 거의 바닥났습니다. 신의 생각은 아주 심하게 재난을 당한 고을이라도 완전히 감해 주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권대운도 아뢰었다.

"조복양은 호조의 저축 가운데 면포 8천 동이 있다는 것을 듣고 전면 감하자는 의논을 낸 것입니다. 그러나 이 면포는 품질이 거칠어 병조에서 쓰는 것만도 못합니다. 이것을 믿고 완전히 감해 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대사간 심재는 다른 의견을 냈다.

"경각사(京各司)의 봉부동(封不動 비상용으로 저축해 둔 은과 베)과 외방 각처의 은포(銀布)를 덜어내어 경상비용에 보태고 신역을 전부 감하소서."

이어서 허적이 아뢰었다.

"여러 신료들의 말이 모두 백성을 구제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니 좋은 일입니다. 강도(江都)와 남한산성에 저축해 둔 목면은 2천여 동에 불과하고 경각사 가운데 태복시의 비축이 가장 많은데도 1천 동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1년의 경비가 8천 동인데 강도와 남한산성 그리고 태복시의 비축을 모두 취한다 해도 나머지 5천 동은 어떻게 마련하겠습니까?"

이러자 현종이 의논을 정리한다.

"전부 감하는 것이 좋긴 하나 나라의 예산은 어찌한단 말인가. 다만 팔도의 백성들이 굶주려 죽을 지경이니 재난 피해가 특히 심한 읍은 전부 감하고 그 다음은 반을 감하는 것이 좋겠다."

그 뒤에 이조참의 김만기의 말에 따라 다소 곡식이 여문 읍 가운데 세 필을 납부해야 할 읍의 경우에도 한 필을 감하도록 명하였다.

팔도 전체에서 재해가 특히 심한 곳이 1백 3읍, 그 다음이 1백 56읍이었고, 나머지 읍들도 평년에 비하여 상당히 재난을 당하였다.

아, 처참한 기근을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홍수와 가뭄과 바람, 서리의 재변이 팔도가 똑같아서 곡식이 여물지 않아 굶주려 죽은 사람이 길에 널렸다. 목숨을 잃는 재앙이 전쟁보다 심하여, 백만의 목숨이 거의 모두 구렁텅이에 빠지게 되었으니 실로 수백 년 이래에 없었던 재난이었다.

그런데 국가가 평소에 비축한 것 없이 갑자기 홍수와 가뭄을 만나 백성들이 굶어 죽는데도 구제하지 못하였으니, 정말 비통한 일이다.

(현종개수실록 1670년 10월 13일, 현종실록 1670년 10월 15일)

위 실록은 의미심장하다.  ‘재정이 파탄 나면 재난 구호도 속수무책’임을.

김세곤 segon53 @hanmail.net

<저작권자 © 호남미래포럼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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