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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 시대의 전염병과 재해 (7)

기사승인 2020.04.27  11: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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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0년 8월22일에 평안 감사 민유중이 치계하였다.

"강변의 각 고을에 기근이 더욱 심하니 금방 다 죽게 된 자들에게 먼저 죽을 꿇여 주어야 하겠습니다. 유배 사는 죄인들도 살 수가 없어 죽음이 눈앞에 있으니, 모두 청천강 남북의 어염(魚塩)이 나는 곳으로 옮기소서."

이러자 현종이 따랐다.

8월23일에 경상 ·전라 · 함경감사들이 물에 빠져 죽은 자를 보고했다. 경상도가 5명, 전라도가 20명, 함경도가 4명이었는데 이들 모두에게 긴급 구호를 베풀었다.

이 날 경기도 강화군 교동진(喬桐津)에 배가 뒤집혀 죽은 자가 36명이었다. 임금은 휼전을 베풀도록 명하였다. 또한 서울 서부에 사는 여자가 굶어 죽었다고 한성부에서 보고하였는데 이 역시 휼전을 베풀도록 명하였다.

8월25일에 현종은 진휼을 논의했다.
현종이 양심합에 나아가 뜸을 맞았다. 진료를 마치고 도제조 정치화 (鄭致和)가 아뢰었다.

"불행히도 기근이 참혹한데 나라의 저축이 이미 바닥이 나서 구휼할 길이 없습니다. 단지 신역을 줄여주어 굶주린 백성들을 침탈하지만 않게 한다면 각자 생계를 도모하여 거의 구활을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상께서 덕을 잃은 일이 없는데 하늘이 돕지 않으심이 이러하여, 굶어죽는 사람 이외에도 물난리에 휩쓸려 죽거나 벼락을 맞고 죽은 사람도 많으니 더욱 참혹합니다."


이윽고 제조 김좌명이 아뢰었다.

"전라 감사 오시수가 신역을 완전히 감면시켜 주기를 청하였는데, 그렇게 하면 은혜는 크겠습니다만 나라의 저축도 생각지 않을 수 없으니, 완전히 감면해 줄 수는 없을 듯합니다."

이러자 현종이 사관에게 좌상과 우상을 부르라고 명했다. 곧바로 좌의정 허적과 우의정 홍중보가 입시하였다.

허적이 전라 감사의 장계를 가지고 조목별로 품의하기를,

“감사가, 호조에 소속된 염분세목(鹽盆稅木) 24동 및 나주와 영광의 염철목(鹽鐵木) 70여 동으로 구휼할 자료를 삼기를 청하였는데, 이것은 허락할 만합니다.”

소금을 팔아서 구휼할 것을 청한 것이다. 이러자 현종이 허락하였다.
허적이 또 아뢰었다.

"매작(賣爵)은 일이 비록 구차하나 과거의 사례에 준하여, 영직(影職) 당상(堂上)·가선(嘉善), 허통(許通), 보충대(補充隊) 첩문(帖文) 각 3백 장 및 승통정첩(僧通政帖) 수백 장을 허락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이는 벼슬과 지위, 병역보충대 편입 등을 파는 일이었다. 이것 역시 임금이 허락하였다.

허적이 또, ‘노비 면천(奴婢免賤) 및 교생면강(校生免講 생도에게 강의 듣는 것을 면제하는 일)에 대한 일’을 품의하니, 현종은 역시 허락하였다.

허적이 또 아뢰었다.

"어영군(御營軍)의 상번(上番)을 면제하면 진구하는 데에 그 보미(保米)를 쓸 수가 있습니다. 5, 6개월 동안 번을 면제하는 것도 안 될 것이 없을 듯합니다.”

어영군은 수도 방어를 맡는 어영청의 상비군이다. 1천 명 정도 있었다.

이 또한 현종이 허락하였다.
이어서 허적은 ‘도망한 공노비에 대해 징수할 곳이 없는 자는 이웃에게 징수시키고 있는데 징수하는 포를 감면시켜 줄 것’에 대해서 품의하니, 현종은 내년 가을까지를 기한으로 하여 징수하지 말 것을 명하였다.
허적이 또 아뢰었다.

"인견할 때에는 삼사(사헌부 ·사간원 · 홍문관)가 으레 모두 입시하는 것인데, 근래에는 입시하라는 명이 단지 유대당상(留待堂上)에게만 내려지니, 일이 매우 온당치 못합니다.“

이러자 현종은 당직자 외의 삼사 관원은 굳이 입시할 것이 없다고 하였다.
이어서 김좌명이 아뢰었다.

"외간에서, 한두 내관이 자못 방자하게 구는 조짐이 있다고 걱정들을 하고 있습니다. 이자들은 필시 상께서 신임하는 환관들일 것입니다."

도승지 장선징도 거들었다.

"옛사람의 글을 읽은 사대부들이더라도 총애와 신임을 받게 되면 대부분 교만 방자해지게 되는데, 하물며 이런 무리들이겠습니까. 이것은 상께서 마땅히 깊이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

하지만 현종은 답하지 않았다. (현종개수실록 1670년 8월 25일)

김세곤 segon53 @hanmail.net

<저작권자 © 호남미래포럼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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