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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 시대의 전염병과 재해 (6)

기사승인 2020.04.21  13: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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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0년 8월21일에 현종은 대신들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허적이 아뢰었다.

"기근의 참혹함이 팔도가 똑같아 백성들의 일이 망극하고 국가의 존망이 결판났습니다. 상께서 만약 ‘백성이 모두 죽는다면 국가가 어떻게 존재하겠는가.’ 하시면서, 이로써 자책하시고 또한 신들을 채찍질하여 격려하신다면 가망이 있습니다만, 요즈음의 조처를 가만히 살펴보건대 크게 그렇지 못한 바가 있습니다.

공주의 저택을 두고 말하더라도 이전에 지은 것도 이미 제도에 지나쳤는데 숙경공주(淑敬公主)의 저택을 이런 때에 새로 짓기까지 한다는 것은 매우 온당치 못합니다.”


숙경공주(1648~1671)는 효종의 6녀로 현종의 여동생이다. 현종은 위로 누나 3명 아래로 여동생 3명이 있었다.

“옛날 우리 선왕께서는 자문(紫門)의 터에 만수전(萬壽殿)의 담장을 뒤로 물려 쌓으려고 하면서도 난처하게 여기시어 조정 신료들에게 물어 모두 옳다고 말한 뒤에야 넓혔는데, 하물며 공주의 저택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숙휘공주(淑徽公主 효종의 4녀)의 집터는 비록 공공의 땅이라고는 하나 철거시킨 집이 많았고, 숙경공주의 집터는 바로 여염집의 소유입니다. 개인적으로 서로 계약하여 사들였다면 그래도 괜찮겠으나, 어떻게 어디서 어디까지 널리 점령하고는 억지로 사들일 수 있겠습니까. 인조께서는 잠저(潛邸)에 계실 때 옹주의 집을 찾아갔는데 터가 너무 좁은 것을 민망히 여겨, 즉위하신 뒤에 공공의 땅을 두 배로 주고 바꾸어 주었습니다. 이번 공주 저택의 집터는 상께서 자세히 모르시고 이렇게 억지로 사들인 것입니까?”

이러자 현종이 말했다.

“옛날 선왕(先王)께서 여러 신료들에게 의논하여 네 궁을 인경궁(仁慶宮) 옛터에 지어 주셨으나, 편히 살 수가 없어 이번의 역사가 있게 된 것이다. 하나의 저택을 다시 짓는 폐단이 과연 어떠한가? 완원군(完原君)과 한산백(韓山伯)의 사우가 있다는 말은 대간이 아뢰는 보고서에서 처음으로 알았다.”

현종은 실정을 전혀 모르고 있다.

이러자 허적이 아뢰었다.

"인경궁의 옛터에서 편안히 살 수가 없었다면 성상의 동기(同氣)간의 지극한 정리로 어찌 다시 지어 주고 싶지 않겠습니까. 다만 숙휘공주의 집터는 인가를 철거시킨 것이 매우 많았으나 그래도 그곳은 공공의 터였습니다. 그런데 이번 숙경공주의 집터는 억지로 사들였으므로 듣는 자들이 모두 놀라워하며, 모두 ‘나라가 망하지 나라가 망하지.’ 합니다. 그리고 완원군은 바로 성종의 왕자입니다. 어찌 현 공주의 저택 때문에 옛 왕자의 사우를 철거할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성덕에 크게 누(累)가 될까 두렵습니다. 한산백 이색(李穡)은 태종 대왕의 친구로서 대단한 은총을 받았는데, 지금 그의 화상(畫像)이 있는 사우가 그 속에 들어있으며, 인목(仁穆)·인렬(仁烈) 두 왕후와 왕대비는 모두 한산백의 후예입니다. 어떻게 공주의 저택을 짓기 위해 그의 사우를 철거할 수 있겠습니까."

이색의 화상이 있는 사우는 서울시 종로구청 근처에 있다.

좌의정 허적(1610∼1680)은 1655년 호조판서를 거쳐 1659년 형조판서를 역임하였고, 남인의 영수로서 1671년에 영의정이 되었다.

이러자 현종이 답했다.

"그렇다면 그 터는 사용하지 못하게 하겠노라."

다시 허적이 아뢰었다.

"당초에는 부득이 하여 빚어진 일이었으나 곡절을 자세하게 아신 뒤에 이렇게 쓰지 않겠다는 하교가 계시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다음날인 8월23일에 사간원 사간 이익상, 헌납 이하, 정언 신후재·홍만종이 아뢰었다.

"현재 하늘이 경계를 보이고 농사는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사망하고 있다는 보고서가 연속하여 올라오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미곡과 베를 들여 크게 토목 공사를 일으키시니, 이게 어찌 수양하고 반성하는 도리이겠습니까. 풍년이 들기를 기다렸다가 옮겨 지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숙휘공주의 저택 짓는 일을 그만두소서"

하지만 현종은 사간원의 의견에 따르지 않았다. 바로 아래 여동생 숙휘공주(淑徽公主 1642~1696, 효종의 4녀)의 건축 공사는 취소하지 않은 것이다. (현종실록 1670년 8월23일)

김세곤 segon53 @hanmail.net

<저작권자 © 호남미래포럼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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