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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를 겸비한 호걸 중 호걸, 금호 임형수

기사승인 2020.03.17  10:5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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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버힌 솔이 낙락장송(落落長松) 아니런가
져근덧 두던들 동량재(棟樑材) 되리러니
어즈버 명당이 기울면 어느 남기 버티리.


대들보가 될 만한 소나무를 베어버린 것을 아쉬워하는 이 시조는 하서 김인후(1510-1560)가 지은 시조이다. 이 시조는 1547년 양재역 벽서 사건으로 사약을 받고 죽은 금호 임형수(林亨秀 1514∼1547)에 대한 만시(輓詩)이다. 하서와 금호는 호당에서 같이 공부한 사이이고 고향도 장성과 나주로 바로 이웃이었다.

임형수는 나이 21세인 153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과 병조좌랑을 역임하였다. 대제학 소세양이 원접사로 명나라 사신을 모실 때 그는 종사관으로 갔는데 시문(詩文)에 능하여 명나라 사람들이 탄복하였다. 임형수는 풍채가 좋고 문장도 뛰어나며 활쏘기와 말타기도 잘하여 사람들이 나라의 대들보라 여겼다.

1539년 7월, 임형수는 회령판관으로 나가게 된다. 회령은 함경도 두만강변으로서 여진족과 접하고 있는 변경이다. 당시 함경도 지방은 연이은 기근과 일부 수령들의 횡포가 커서 백성들을 진정시키기에 적당한 인재가 필요했던 바, 중종은 임형수를 지목하였다.

그런데 임형수를 회령판관으로 보내는 것에 대하여 여러 중신들의 의견이 분분하였다. 판관으로 보내서는 안 된다는 의견과 보내야 한다는 의견이 엇갈렸다. 그렇지만 중종의 금호에 대한 신임은 한결 같았다. “이 사람은 문무가 뛰어나니 내가 변방에 보내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회령에 부임한 임형수는 호방한 기질을 마음껏 발휘하였다.
그는 때로는 2일분을 한꺼번에 먹기도 하고, 혹은 하루에 여러 사람의 밥을 겸하여 먹기도 하며 말하기를, ‘장수된 자는 이러한 습성이 없어서는 안 된다.’하였다. 변경의 되놈을 어루만져 편하게 해 주어서 복종하였다. - <해동잡록>에서

이 시절에 금호는 수항정(受降亭 항복을 받는 정자) 시를 지었는데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의 <국조시산>에 실려 있다.

취하여 호상 (胡床)에 기대어 물소 뿔 술잔을 드는데
미인이 옆에 앉아 정답게 아쟁을 타네.
모랫벌에서 싸움 마치고 느즈막히 돌아올 때
말 달려 얼어붙은 강에 이르니 칼과 창이 우는구나.


허균은 이 시의 말미에 ‘호탕함이 지극하고 의협의 기질이 나부끼는 듯하다’ 고 평하고 있다.

1545년 7월에 명종이 즉위하고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부제학 임형수는 제주목사로 좌천된다. 실세인 명종의 외삼촌 윤원형이 보복을 한 것이다. 그런데 윤원형은 제주목사로 발령 난 임형수의 마음을 떠보려고 송별연을 마련했다. 병 주고 약 주고였다.

“자 어서 드시지요. 부제학.”

두주불사인 임형수는 윤원형을 말끔히 노려보다가 한마디 하였다.

“공이 나를 죽이지 않는다면 내 주량대로 마시리다.”

겁에 질린 윤원형은 그 자리를 떴고 이후 윤원형은 임형수를 제거하기로 작정했다.

1547년 9월에 양재역 벽서 사건이 터졌다. 임형수는 윤임과 가까운 사람으로 지목되어 제주목사에서 파직되었다. 며칠 후 벽서사건 고발자인 부제학 정언각이 다시 상소한다. 임형수를 너무 가볍게 처벌하였다는 것이다. 결국 임형수는 사약을 받는다.
1547년 9월 21일의 <명종실록>에는 임형수의 사약 받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임형수는 그때 파직되어 집에 있었는데, 죽을 적에 부모에게 절하고 그 아들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내가 나쁜 짓을 한 일이 없는데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르렀다. 너희들은 과거에 응시하지 말라.’ 하고, 다시 말하기를, ‘무과일 경우는 응시해도 좋고 문과는 응시하지 말라.’ 하였는데 조금도 동요하는 표정이 없었으며, 사약을 들고 마시려고 하다가 의금부 서리를 보고 웃으며 말하기를 ‘그대도 한 잔 마시겠는가?’ 하였다.

<유분록>에는 임형수가 사약을 열여섯 사발이나 마셨는데도 까딱도 하지 아니하자 다시 두 사발을 더 마시게 했는데도 죽지 않았다. 그래서 목을 졸라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나주시 문평면 송재사와 광주광역시 광산구 등림사에는 그의 신위가 배향되어 있다. 나이 33세에 희생당한 임형수. 그는 정녕 문무를 겸비한 호걸 중 호걸이었다.

김세곤 segon53 @hanmail.net

<저작권자 © 호남미래포럼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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