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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다시 본다.

기사승인 2019.09.16  13: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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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1894년)과 러일전쟁(1904년)의 닮은 점과 다른 점은 무엇일까? 닮은 점은 두 전쟁 모두 한반도의 지배권을 두고 싸웠고, 전쟁은 선전포고 없이 일본의 기습공격으로 시작되었으며, 일본이 모두 승리한 점이다.

다른 점은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이겼지만 러시아 등 3국 간섭으로 한반도 지배에 차질이 생겼고, 러일전쟁에서 이긴 후에는 미국과 영국의 양해를 얻고 한반도를 지배하게 된 점이다.

1894년 2월10일(음력1월10일)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분노하여 녹두장군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들이 봉기했다. 5월31일(음력 4월27일)에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하자, 고종과 민왕후는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했다. 특히 민왕후는 흥선대원군이 동학농민군의 배후조종자라는 소문에 지나치게 민감했다. 1882년 임오군란의 악몽이 되살아났기 때문이었다.

6월초에 청군이 아산에 도착했다. 1885년에 청·일간에 맺은 천진조약에 따라 일본군도 인천에 들어왔다.

6월11일에 전봉준은 전주성에서 전라감사 김학진과 화약(和約)후 자진 해산했다. 하지만 일본군은 물러나지 않고 7월23일에 경복궁에 진입했고 청·일 간에 전운(戰雲)이 감돌았다.

7월25일에 일본 해군은 아산만 풍도에서 청나라 함정을 기습 공격했다. 8월1일에 일본은 선전포고 하였다. 일본은 1882년 임오군란과 1884년 갑신정변에서 청군에게 패배한 이후 군비확충을 위해 전력을 다했다. 1883년부터 1893년까지 10년간 군함 55척을 보유하여 청나라 해군력과 필적하였고, 육군은 병력증강과 신무기로 무장하였다.(신명호,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이리하여 일본군은 평양전투와 황해해전에서 승리했다. 1895년 2월12일에 일본해군은 북양함대 기지 위해위를 궤멸시켰다. 북양함대 패전은 부패 때문이었다. 여제(女帝) 서태후가 60세 회갑을 맞아 북경의 이화원을 중수하느라 해군예산을 몽땅 쓴 것이다. 북양함대에는 포탄이 단 세발 밖에 없었다 한다.

이러자 이홍장은 일본으로 달려갔다. 이홍장은 피습을 당하는 수모를 겪으면서 1895년 4월17일에 이토 히로부미와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했다.

조약의 주요골자이다.

1. 조선이 완전한 독립국임을 승인한다.

2. 요동반도·대만· 팽호 열도를 할양한다.

3. 2억 냥의 전쟁배상금을 지불한다.

그런데 6일 후인 4월23일에 러시아 · 독일 ·프랑스 3국이 일본의 요동반도 점유를 반대하고 나왔다. 이른바 삼국간섭이었다. 4월29일에 일본은 어쩔 수 없이 요동반도 반환을 결정했다.

러시아의 힘을 알게 된 고종과 민왕후는 친러로 돌아섰고, 일본은 1895년 8월20일에 민왕후(1897년에 명성황후로 추존됨)를 경복궁에서 시해하였다.

1896년 2월11일 새벽에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고(아관파천), 1897년 2월20일에 환궁하였다. 그리고 10월12일에 대한제국을 선포하였다.

한편 일본은 러시아와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하고 군비를 확충하고 준비를 철저히 했다. 1902년에 일본은 영국과 영일동맹을 맺고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공동 저지하기로 합의했다.

1904년 2월8일 밤, 일본 해군은 여순항에 있는 러시아의 극동 함대를 기습공격 했고, 2월9일에는 제물포항의 전함 두 척을 공격했다. 2월10일에 일본은 정식으로 선전포고했다. 청일전쟁 때처럼 기습공격 후 선전포고한 것이다.

고종은 선전포고 하루 전인 2월9일에 국외중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일본은 이를 무시하듯 한양을 점령하고 2월23일에는 강제로 한일의정서를 체결했다. 8월에는 일본 측 고문(顧問)임명을 통해 내정간섭을 본격화했다.

일본군은 1905년 1월에 여순을, 3월에는 봉천을 점령했다. 이러자 러시아의 유일한 희망은 발틱 함대였다. 1904년 10월에 발트 해를 출발한 발틱함대는 일본과 동맹을 맺은 영국의 방해로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지 못하고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돌아 지칠 대로 지친 상태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가기 위하여 7개월 만에 대한해협에 도착하였다.

전투준비를 끝낸 일본연합 함대는 1905년 5월27일에 쓰시마 섬 근처에서 발틱함대를 궤멸시켰다.

한편 도쿄를 방문한 미국 육군장관 태프트는 7월29일에 가쓰라 수상과 밀약을 맺었다.(가쓰라-태프트 밀약) 미국은 필리핀의 지배를 보장받고 일본은 한국의 지배권을 확보한다는 것이었다.(이 밀약은 1924년에야 공개되었으니 고종이 알 리 없었다.)

8월12일에 일본은 영국과 제2차 영일동맹을 맺고 한국의 지배권을 보장받았다.

9월5일에 미국 시어도어 루스벨트대통령 중재아래 러·일 간에 ‘포츠머스 강화조약’이 체결되었다. 주요내용은 ‘러시아 정부는 일본이 조선에 대해 정치 · 경제 · 군사상의 우선적 이익을 가진다는 것을 승인한다.’였다.

이렇게 약소국이 강대국의 먹잇감이 되는 국제질서는 냉혹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루스벨트 대통령은 러·일 중재 덕분에 1906년에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1905년 11월17일에 일본은 을사늑약을 맺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탈취했다. 11월24일에 미국 본토의 철수통고를 받은 주한미국공사는 11월28일에 외국 공관장 중에 가장 먼저 한국을 떠났다. 이후 다른 외국 공관들도 잇따라 철수했다. 대한제국은 사실상 식물국가였다.

김세곤 segon53 @hanmail.net

<저작권자 © 호남미래포럼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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