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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학과 절의의 선비, 죽천 박광전 (5)

기사승인 2019.09.02  13:4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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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남인물 순례 3

- 칠순의 의병장 박광전

1592년 4월13일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4월27일에 신립장군이 탄금대에서 패하자 선조는 4월29일 밤에 한양을 떠나 북으로 피난 갔다. 5월3일에 왜군은 한양에 무혈입성하고 조선 전역을 점령했다. 오직 남은 곳은 전라도와 평안도 일부였다.

이때 나라를 구한 것은 전라수군과 의병들이었다.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한산대첩으로 제해권을 장악했고, 호남의 김천일 · 고경명, 경상의 곽재우, 충청의 조헌 등이 의병으로 나서 왜군과 싸웠다. 그런데 담양에서 거의하여 6천명의 의병을 모은 고경명(1532∽1592)이 7월10일 금산전투에서 순절했다. 이 소식을 듣자 박광전은 병(病)중에 격문(檄文)을 썼다.

“7월 모일에 전라도 전(前) 현감 박광전, 임계영등은 능성현령 김익복 등과 더불어 삼가 두 번 절하며 열읍 여러 벗님에게 통문을 돌립니다.

아! 국가가 의심없이 믿고 걱정하지 않았던 것은 하삼도(下三道)인 경상, 충청, 전라도가 건재하기 때문이었는데, 경상도와 충청도는 이미 적의 소굴이 되었고 오직 호남만이 겨우 한 모퉁이를 보전해서 군량의 수송과 군사의 징발이 오직 전라도만을 의지하고 있으니, 국가를 일으켜 세울 기틀이 실로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중략) 이 격문이 도착하는 날에 즉시 뜻있는 사람들과 함께 이 달 20일 보성 관아의 정문 앞으로 모이십시오. 창의를 도모하십시오."


7월20일, 보성관아에 700명의 의병이 모였다. 전라좌의병은 임계영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와병 중인 박광전의 큰 아들 박근효는 참모관이 되었고, 동생 박근제도 의병에 참여하였다. 박광전은 두 아들을 의병으로 보낸 것이다. 전라좌의병은 순천에서 장윤과 합류하여 장윤을 부장으로 삼았다. 이후 전라좌의병은 경상우도감사 김성일의 요청으로 최경회가 이끄는 전라우의병과 함께 진주성 전투에 참여하여 10월의 진주대첩에 일조한다.

1593년 12월27일에 광해군은 전주에서 과거를 보여 문신(文臣) 11명과 무신(武臣) 1천6백 명을 뽑았다. 광해군의 사부였던 박광전은 병든 몸으로 전주로 달려갔다. 그는 광해군에게 ‘시무책 10조문’을 올린다. 시무책의 핵심은 먼저 민생이 안정되어야 하고, 백성들이 농사를 지어 식량을 생산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광해군은 시무책을 자세히 살피고 박광전을 극진히 대접했다.

1597년에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왜군은 전라도부터 초토화시켰다. 8월16일에 남원성을 함락하고 8월18일에 전주에 무혈 입성했다. 이 때 전라감사 황신과 고을 수령들은 도망치기에 바빴다. 황신은 부안으로 피신했고 정읍현감, 진원현감 등 도망간 수령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다행히도 9월7일에 명나라 군대는 직산에서 왜군을 물리쳤다.

왜군은 남하하면서 9월16일에 정읍에서 회의를 하고 시마즈 등 13명의 장수들이 전라도에 주둔하기로 했다. 왜군들은 백성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고 코를 베었으며 산하를 불태웠다. 이러자 백성들은 산속으로 숨고 배를 타고 피난 가기에 바빴다. 72세의 박광전도 보성군 문덕면 천봉산으로 피신했다. 10월에 생원 박사길이 숲속에서 나와 말했다.

“국가의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어찌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 수 있겠습니까. 마땅히 의병을 일으켜서 국가의 일에 죽읍시다.” 그러자 사람들이 박광전을 의병장으로 추대했다.

박광전은 “난리는 날로 급박해지고 나의 병세도 날로 위중하니 나는 곧 죽을 것이요. 그러나 한 줄기 목숨이 아직 붙어 있으니 맹세코 이 왜적들과 같은 하늘 아래에서 함께 살 수는 없소.” 하고 결속을 다졌다.

박광전 의병은 동복전투(화순군 동복면)에서 시마즈의 왜적을 물리쳤다. 보기 드문 값진 승리였다. 이러자 왜적들은 일시 순천 쪽으로 물러났다.

그런데 도망간 고을 수령들은 관내를 이탈한 죄도 큰 데 박광전의 공을 시기하여 전라감사 황신에게 모함하였다. 황신은 박광전을 전주감영으로 불러 조사했다. 박광전은 참담했다. 의병으로 나섰는데도 자신을 죄인 취급하다니. 전주감영에서 조사를 받은 박광전은 조상의 묘소가 있는 진원현(장성군 진원면)에 들렀다. 비참한 심정을 조상님에게 말하고 싶어서였을까. 아니면 그의 마지막 길을 예감하여서였을까. 11월18일에 죽천 박광전은 세상을 떴다.
칠순의 의병장 박광전, 그는 정녕 실천의 선비였다. (연재 끝)

박광전 묘소

(참고문헌)
o 김세곤, 도학과 절의의 선비, 의병장 죽천 박광전, 온새미로, 2016
o 송의호, 애민 · 충절로 의병 일으킨 죽천 박광전, 월간 중앙, 2019년 4월호, p 336- 340

김세곤 segon53 @hanmail.net

<저작권자 © 호남미래포럼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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