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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주자학의 아버지 강항

기사승인 2019.04.23  10:3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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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남의 인물순례 1

강항의 영정

1592년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한 호남은 1597년에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초토화되었다.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에서 삭탈당하고 백의종군하자, 왜군은 7월16일에 칠천량에서 원균이 이끄는 조선수군을 전멸시켰다.

 

왜군은 전라도부터 쳐들어가서 8월16일에는 남원성을 함락시키고 8월18일에는 전주성에 무혈 입성했다. 왜군은 전주회의에서 군사를 나누어, 우군은 서울로 진격하고 좌군은 전라도 곳곳을 점령했다.

 

왜군 좌군은 전라도 백성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고 코를 베어갔으며, 여자를 겁탈하고 포로로 끌고 갔다. 한마디로 전라도는 아비규환이었다.

 

다행히도 9월16일에 이순신이 명량해전에서 승리하여 일본군의 서해 진출을 막았다. 이후 이순신이 군산 근처 고군산도로 진영을 옮기자, 왜군은 보복이라도 하듯 왜군수군과 육군이 합세하여 무안 · 해남 · 영광 · 등 전라도 일대를 초토화시켰다.

 

9월23일에 호조좌랑 수은 강항(1567∼1618) 일가는 영광 앞바다 논잠포(영광군 염산면)에서 왜장 도도 다카도라의 부하에게 잡혔다.

 

강항은 일본 시코쿠 지역의 오즈성(大津城 현재 에이메현 오즈시)으로 끌려가 포로 생활을 하였다. 그는 탈출을 시도하다가 붙잡혀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하였는데, 유학자이고 관리라는 신분이 밝혀져 교토 후시미성으로 이송되어 거기에서 승려 후지와라 세이카, 영주 아카마쓰 히로미치 등을 만나 이들에게 주자학을 가르쳤다.

 

후지와라 세이카는 에도 시대 주자학의 비조(鼻祖)이다. 그의 제자 하야시 라잔도 에도 막부의 대학두(大學頭)로 활동하였다. 에도 막부는 사무라이들에게 신분질서를 확립시키는 주자학을 가르쳐 270년간 도쿠가와 쇼군 시대를 유지하였다. 그리하여 일본에서는 강항을 ‘일본 주자학의 아버지’로 추앙하고 있다.

 

강항은 포로 생활 중에도 왜국의 기밀을 파악하여 선조에게 소를 올렸다. 그는 1598년, 1599년에 세 차례 적중봉소(賊中封疏)하였는데 명나라 사신 왕건공에게 보낸 것이 조정에 도달하였다. 이는 1599년 4월15일자 선조실록에 나온다.

 

1600년 5월에 귀국한 강항은 일본에서의 환란생활을 기록한 '간양록(看羊錄)'을 남겼다. 간양은 중국 한나라의 소무(蘇武)가 흉노의 포로가 되어 19년간 양을 치는 수모를 겪었다는 데에서 따온 것이다.

 

한편 강항은 절의를 지킨 선비였다. 1607년에 회답 겸 쇄환사로 일본에 간 부사 경섬은 '해사록'에서 ‘왜인들의 말에 의하면, 강항이 포로 되어 온 지 5년 동안 자신의 바탕을 무너뜨리지 않았고, 의관도 바꾸지 않고 방에 조용히 앉아 책이나 보고 글을 짓기만 일삼았다.’고 기록하였다.

 

1980년에 '간양록' 드라마가 MBC에서 방영되어 강항에 대한 대중화 작업이 활발하였다. 사극 작가 신봉승이 가사를 쓰고 조용필이 부른 주제가 '간양록'은 지금도 심금을 울린다.

 

이국땅 삼경이면 밤마다 찬 서리고

어버이 한숨 쉬는 새벽달 일세.

마음은 바람 따라 고향으로 가는데

선영 뒷산에 잡초는 누가 뜯으리.

2002년에 방영된 KBS '역사스페셜'도 강항을 우리의 선조임에도 우리보다 일본에서 더 많이 알려진 인물로 소개하였다.

 

그러면 다음 회부터 강항의 환난 여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김세곤 segon53 @hanmail.net

<저작권자 © 호남미래포럼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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