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얽매임 없는 동편제 명창 송만갑[宋萬甲]

기사승인 2017.01.23  09:0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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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5년 전라남도 순천군 낙안면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출생지를 두고 구례(求禮), 진주(晉州), 남원(南原) 이라는 견해가 있지만 낙안(樂安)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또한 그의 본관을 두고 은진(恩津) 또는 여산(礪山)으로 기록되고 정확하지 않다. 송만갑은 전통적으로 판소리를 이어온 집안에서 출생하였는데 그의 부친이 명창 송우룡(宋雨龍)이고 할아버지는 당대 최고의 명창으로 알려진 송흥록(宋興祿)이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 판소리를 배웠고 동편제 판소리의 대가였던 박만순(朴萬順)에게 찾아가 소리를 배웠다. 송만갑은 10대 때 벌써 전라도 일대에서 명창으로 알려지기 시작했고 전국을 순회하며 공연에 참가하였다. 그는 이미 동편제의 소리꾼으로서 자질을 인정받았다.

송만갑의 동편제 창법은 할아버지 송흥록으로부터 전해지는 집안의 전통적 법제(法制)에서는 많이 벗어났다. 이 때문에 부친 송우룡과 소리논쟁을 일으켰고 집안에서 쫓겨나기도 하였다. 그는 웅장하고 호탕한 동편 소리의 특성에다 새로운 창법을 더해 불렀는데 당시 시대적인 특성과 유행을 반영하여 통속(通俗)과 평이(平易)를 신조로 한 동편(東便)의 새로운 모색을 시도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그는 상청(고음)에서 탁월한 기량을 가지고 있었다. 1902년 고종의 명으로 조선팔도에서 명창과 춤군, 기생들을 불러모아 협률사를 만들 때 명창 김창환(金昌煥)과 함께 가장 먼저 참가하였다. 협률사에서는 고종 어극 40년을 기념하는 칭경예식(稱慶禮式)이 준비되었고 송만갑은 이곳에서 소리를 담당했다. 송만갑은 어전(御前)에서 판소리를 불렀으며 고종의 총애를 받아 감찰직(監察職)을 제수받았다. 1906년 협률사가 비판적인 여론 때문에 해체되자 궁내부(宮內府)에 소속된 별순검(別巡檢)을 제수받아 함경도와 황해도 일대를 감찰하며 3개월 동안 근무하기도 하였다. 다른 국창들처럼 명예직으로 벼슬을 하사받은 것과는 달리 이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1908년 조선 최초의 사설극장인 원각사가 설립되자 이곳에서 공연하였으며 활동했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낙향하여 전라남도 구례에 거주하며 주변의 소리꾼들을 가르치고 양성하였다. 이후 고향인 전라남도 순천 낙안으로 이주하여 거주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 자신의 노래를 음반으로 취입하였는데 일본축음기회사에서 첫 음반을 제작하였다. 이후 일동축음기회사(Nitto), 콜롬비아 레코드사, 빅터 레커드사 등에서도 제작되었다. 1933년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가 설립되자 교육부장으로 부임하여 후진양성에 힘썼다. 박봉래(朴奉來), 김정문(金正文) ·김광순(金光淳) ·박녹주(朴綠珠) ·박초월(朴初月), 김연수(金硏壽) 등의 제자들을 배출시켰다. 또 《춘향가》, 《심청가》를 창극화했으며, 특히 《춘향가》 중에서도 《농부가(農夫歌)》를 잘 불렀다. 1939년 74세를 일기로 작고하였다. 전라남도 구례군 구례읍 백련리 574번지에는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동편제판소리전수관이 있으며 그가 살았던 초가집이 복원되어 있고 노래비, 동상이 세워져 있다.(두산백과)

대한민국을 생각하는 호남미래포럼 기자 honamff@naver.com

<저작권자 © 호남미래포럼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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