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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시대 투철한 개혁자 오달운[吳達運]

기사승인 2017.07.31  23: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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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0년 전라남도 해남군 청계면(지금의 계곡면) 용지리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동복(同福), 자는 백통(伯通), 호는 해금(海錦)이다. 18세기의 진보적 사회개혁을 꿈꾼 실학자이다. 10세 무렵 영암에 은거하던 김순형(金舜衡)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향시(鄕試)에도 4번이나 장원하였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고 고향에서 실용학문인 병서·산경 등의 연구에 진력하였다. 1732년 금성(지금의 나주)으로 옮겨가 영산강가에 서당을 세우고 학문에 정진하며 인재를 양성하였다.

1740년(영조 16) 과거에 나가 감시(監試:국자감시라고도 함) 양장과 식년시(式年試)의 논(論)과 책(策), 대과의 회시(會試)에서 모두 장원하였다. 1741년 성균관 학유(學諭)로 임명되었고 곧 승정원 사관(史官)이 되었으나, 아버지가 병환을 얻자 고향으로 돌아와 봉양하였으며 돌아가신 뒤에는 3년상을 치렀다.

1746년(영조 22) 오수도찰방(獒樹道察訪)에 제수되었으며 임지인 전라도 남원에서 백성을 위한 선정을 펼쳐 칭송받았다. 1747년 6월 도회시(都會試)의 시험관으로 나갔다가 더위를 먹은 데다 지병이 겹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해금집》(1828)과, 실학서 《상제상서(上帝相書)》, 《종학도설(從學圖說)》 《인극도설(人極圖說)》 《공도회의(公都會議)》 《가주전변부의(加鑄錢便否議)》 《왕패략호남책(王覇略湖南策)》 등이 있다.

계곡면 용지리에 있는 용지사(龍池祠)에서 배향하고 있으며, 산이면 대진리에 묘소와 제각이 있다.(두산백과)

대한민국을 생각하는 호남미래포럼 기자 honamff@naver.com

<저작권자 © 호남미래포럼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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