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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대표 화가 윤두서 [尹斗緖]

기사승인 2017.07.31  23: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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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해남이고 자는 효언(孝彦)이며 호는 공재(恭齋)이다. 윤선도(尹善道)의 증손이다. 그의 아들은 윤덕희(尹德熙)이고 그의 외손자가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이다. 젊어서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고 시서생활로 일생을 보냈으며 죽은 뒤 가선대부·호조참판이 추증되었다.

그는 시·서·화에 두루 능했고, 유학과 경제·지리·의학·음악 등 여러 방면에 박학을 추구하던 학자이기도 하였다. 그는 실학자였던 성호 이익(李瀷)과도 깊은 친분을 맺고 있었다. 15세에 혼인하여 2남 1녀를 두었으나 그가 22세 때 부인이 사망했다. 그의 셋째형은 당쟁에 휘말려 귀양지에서 사망하였고 큰형과 함께 모함을 받아 고생을 하였다.

이런 사건들로 인해 윤두서는 벼슬길에 나아갈 뜻을 버리게 된다. 또한 그의 절친한 친구였던 이잠(李潛-성호 이익의 형)이 장희빈을 두둔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맞아죽는 일까지 생기자 그는 더욱 침잠하게 되었다. 윤두서가 46세가 되던 1713년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해남으로 이주하였다가 2년후 사망하였다.
화가로서는 특히 인물화와 말을 잘 그렸는데, 산수화를 비롯한 일반 회화작품은 대체로 조선 중기의 화풍을 바탕으로 한 전통성이 강한 화풍을 보인다. 그러나 인물화와 말 그림은 예리한 관찰력과 뛰어난 필력으로 정확한 묘사를 하였으며,

이를 대표하는 작품으로는 현재 그의 종손가에 소장되어 있는 《윤두서 자화상》(국보 240호)을 들 수 있다. 그가 남긴 작품 중《나물 캐는 아낙네》, 《밭가는 농부》, 《짚신 삼는 사람》은 모두 하층민의 일상생활을 소재로 한 것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적인 서민풍속화로 평가할 수 있으며 조선 회화상의 새로운 분야를 개척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화풍은 아들인 덕희와 손자인 용(愹)에게 계승되고, 조선 후기의 화가 허유(許維)도 종가에서 그 전통화풍을 익혔다 한다. 유작으로는 60여 점의 그림이 수록되어 있는 《해남윤씨가전고화첩》(보물 481)을 비롯하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인 《노승도(老僧圖)》 《출렵도(出獵圖)》 《백마도(白馬圖)》 《우마도권(牛馬圖卷)》 《심산지록도(深山芝鹿圖)》 등이 전한다.(두산백과)

 

대한민국을 생각하는 호남미래포럼 기자 honamff@naver.com

<저작권자 © 호남미래포럼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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